안녕 재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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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상세한 후기 고마워.
지난주 송은대상과 남화연 전시를 함께 보려고 강남을 갔는데.. 그날이 마침 에르메스 갤러리 휴관일이어서 아쉽게도 기대했던 전시를 못 봤었어.
덕분에 당시의 공기를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어서 기쁘다.
일단 나는 실제로 전시를 보지 못한 입장에서/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브리엘에 대한 텍스트들을 보며 증후(전조증세)라는 말이 이번 전시를 중요하게 관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너의 후기를 들어보니 증후들을 엄청 다양하게 해석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해 보인다.
나는 전시 아카이브 이미지를 처음 봤을 때 전시장 중앙을 횡단하는 관악기 모양의 설치물이 재미있어 보였어. 아마 내가 어렸을 때 플루트를 배웠던 경험
+ 뱃심이 좋아 어느 관악기라도 무난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 때문인가? (참고로 초등학교 때 단소를 입에 대자마자 소리가 나서 기뻤어)
관악기는 유독 나에게 다른 악기들 보다 따듯하고 신비롭게 다가와. 문득 처음 플루트 배우러 갔을 때 경험이 생각나는 데,
플루트를 불기 전 '숨을 뱉는 법'부터 공부하면서 선생님이 내 아랫배에 손을 얹고 몸속에 머물러 있는 호흡들이 움직이는지 확인했던 게 기억에 난다.
숨을 불러일으켜야지 소리가 나는 대상들. 어느 구멍들을 경유한 숨이 귀에 도달해서 아름다운 소리로 인식된다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니?
전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관악기들이 관의 길이가 끝없이 연장된다거나, 꺾인다거나, 중첩되어 솟아오르는 등의 변형을 통해 바뀌었는데
그게 나한테는 미래에 그 소리를 들을 누군가의 귀에 과거의 숨결이 도착하기까지의 시간들을 간직한 조각들처럼 보였어.
설명을 보니 '사운드 조각'이라는 데, 실제로 전시를 보지 못해서 이 악기들에는 어떤 소리가 들렸을지 정말 궁금하다. 다음 메일엔 그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줄 수 있니?
텍스트로 정리한 무빙 이미지들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며 과거의 시간들이 미래에게 미리 전달할 메시지를 중간에 열어본 듯한 인상을 받았어.
최근에 비선형성이라는 개념을 자주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무엇이 비선형을 유도하는가? (단순히) 그동안 잘 구축되었던 서사들에 대한
예측을 깨트리는 모든 행위들인지? 그렇다면 왜 비선형성은 비교적 근현대의 개념이 된 건지..?
너무나도 선형적인 콘텐츠를 접하고 선형적 읽기와 듣기에 잘 교육된 뇌여서 그런지 비선형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어렵더라고.
그러다가 일민미술관 3층 오민의 렉처 비디오와 올해의 작가 상 인터뷰에서 레퍼런스로 말했던 크리스 마커의 스틸 이미지와 무빙 이미지의 연속과 교차에서 볼 수 있는 잠재적 움직임
https://www.youtube.com/watch?v=J4alVG6Buwk (6분 38초), 그리고 고다르 영상 분석 논문을 읽으며 비선형성에 대해 흐리지만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혀가고 있는 듯해.
'그것이 본래 속해 있던 원천적 맥락(시대, 작가, 내러티브의 시공간적 맥락 등)에서 의도적으로 분리해내어, 그와 전혀 다른 이질적 맥락(시간적, 공간적, 서사적)의 사료(이미지)들과 재배치한다. 추출된 이미지-파편들은 때로 그 원천을 재확인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미시적으로 분리, 절단되기도 한다.'
이런 저런 배움을 통해서 다시 남화연 작가의 가브리엘(실체를 알 수 없는 도래할 사건을 고지하고 예감하는 이미지와 소리들의 집합 )에 대한 재훈의 해석을 나는 다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 확실한 건 '정지된(파편된) 기록 사이 부재된 움직임을 찾기' 를 시도했던 지난 최승희 작업에서 보았던 힘이 가브리엘에서는 '정지된 기록 속에 잠재된 시간을 명확히 바라보기'로 향해가는 거 같아.
내일 모레 제주도로 가는데 많이 기대된다..
그린커리를 같이 나눠먹는 행사도 있는데 예약이 안되네.. 아쉽다.
많이 기록하고 기억해서 생생한 전시 후기로 다시 돌아올게~!
앎에 성공하는 것과 별개로 알고자 하는 마음
재훈
2023.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