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운 땅 - 공중 - 에서의 회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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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상과 장소
차연서 작가의 전시 《거상거상 거상거》(Hum Bomb, Hum Bomb, Hum Bomb Hum)에서 본 것에 대해 쓰며, 나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천국과 지옥의 법 속 중간 지대를 상상하고 있다. 음과 양, 위아래의 좌표 없는 곳에서 아래를 향하는 확고한 움직임을 발견했을 때야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순의 움직임과 그것을 데려갈 방향키를 잠시 잡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존재가 등장하는 축제에 나는 입장하고, 2층의 <축제 대차> 카트의 빈 공간을 발견한다. 이 여백은 아직 나의 뛰어들기에 응하지 않는 것 같다. 나를 다른 중력으로 데려간다. 수수께끼 속에서 읽은 차연서의 ‘거상거상 걸어가는 모양’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이 전시 공간이 그의 남양주 작업실에서의 기억을 겹쳐 놓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이 공간에 놓인 작업을 통해 그의 기억을 상상해 본다. 도착하는 것은 과거를 맴도는 물질과 계속해서 모습을 뒤바꾸는 기억의 유령이다. 나는 이 조각들의 표면에서 그의 이야기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단서들을 두드렸다. 그의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잠시 눈을 두고, 그 공간이 허락할 때까지 상상해 본다.


# 2 재고, 자르기
나는 2024년 3월에 을지로의 전시 공간, 산업 화랑에서 진행했던 《꽃다발은 아직》(KKOCH-DA-BAL is still there, 2024)의 기억과 지금의 관람을 같이 두고 보기로 한다. 남아 있는 것은 구체적이지는 않으나, 내 손에 주어졌던 김언희 작가의 인용문이 실린 지류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번 N/A 2층 전시장에는 한 점, 한 점의 수묵화라고 불러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발기한 것들 (䘒)> 혹은 <오그라진 것들 (脧)>의 이름과 종이 콜라주의 경계를 바라보며 차연서가 사용한, 작가의 이름을 소환하고 그 인물들의 입을 빌리는 인용문의 방식과 아버지의 종이를 가져와 만드는 행위들을 떠올린다.

그것들에서 느껴지는 일련의 은밀함은 나에게 필사하는 인물을 상상하게 한다. 필사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일련의 자리 이동을 생각해보면 나는 전유의 신비로움을 발견하는데, 대상이 한 사람의 몸 앞에 나타나고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소화하는 과정이 어떠한 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필사는 전유의 준비 운동이 되거나 그 자체로 한 방식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구멍으로 통과시킨 대상을 한 번 더 내 것인 듯 물질로 작성해 보며 그것을 삼키는 연습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과 나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가까이 혹은 멀리, 거리를 파악해 보는 ‘시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차연서의 시점은 아버지에 대한 어린 딸의 이름에서부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이름에서의 곤란함을 발견하고 애를 쓰는 곳에 위치한다. 대상의 실루엣을 오리며 경계를 나누는 가위질이 차연서가 사용하는 전유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라면, 그렇게 잘린 모습들은 나와 대상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것들을 망막 속에 놓고는 3층으로 올라가 마주한 벌레와 나무의 실루엣을 한 <꼬맹이 소나무>를 경련하는 존재들의, 계보도의 일종으로 이해해 본다. 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존재들이 기어 계보를 만들고 동시에 어지러뜨리기도 하는 모습은 차연서가 그곳에서 듣고 옮겨낸 수수께끼의 존재들이다.


# 3 경련하는 소리
차연서의 이야기를 통한 환상성은 나무 뼈대를 노출한 채로 빛을 길게 늘어뜨린 단색광에 의해 극대화된다. 3층에서 들리는 풀벌레, 바람, 식물 옆을 스치는 소리는 이곳의 인력을 강하게 만든다. 나는 이 소리와 색을 떠올리며 전구를 감싸고 도는 대나무 살이 소리를 일으키는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노란색과 주황색을 오가는 이곳은 마치 밤인 것 같다. 걷다 마주한 집의 현관등인 것 같다. 청각을 일으키는 조각이란 가정은 달콤하다. 그의 조각은 물리적인 소리를 일으키는 상상을 매개함과 동시에 그 자체를 소리에 비유할 수 있다. 그곳에는 침묵이 있고, 동시에 그 주위를 나선으로 대나무 살들을 타고 울리는 메아리가 있다. 이 경련하는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글을 쓰며 떠오른 김혜순 시인의 시, <비탄 기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반복되는 통증들은, 이 ‘리듬은 발이 바닥에 닿지 못하게 하는 공중부양 수용소’들이다.


# 4 사물로의 변신
‘Daddy’라는 이름이 달린 영상에서 흰 레이스 드레스와 스타킹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장한 여인이 집에 도착한다. 발에 묻은 물기를 털고 그는 오늘의 할 일을 마친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다. 이 영상의 등장인물인 여인은 그 숲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재훈의 분신인 여인이 계속해서 분열하는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차연서가 불러낸 다른 존재들처럼 그는 밖에서 펼쳐지고 집에서 쪼그라든다. 재훈과 그 여인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그가 사물을 제대로 보며 그 사물과 닮아가고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사물을 제대로 본다는 건 어떤 걸까? ‘제대로 보기’에는, 고쳐 말해, 대상이 자신과 분리되지 않아 생기는 언어 잃음에는 하나의 관문인 자리 이동, 즉 변신이 있다. 자신의 몸과 경련하는 몸들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시야의 거리를 찾아가듯, 스스로의 현재를 상처 내거나 버리기. 그런 의미에서 상상의 한 종류인 기대와 상처 내기는 닮아있다.


# 5 애도의 여러 갈림길
재훈의 여인은 차연서의 인용임과 동시에 하나의 펄쩍이는 대상이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응시는 서로의 양가성을 확고히 해준다. 차연서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애도를 느끼게 하며, 재훈의 중심 위치를 돌리는 유목적 여성되기는 차연서의 진동하는 ‘몸’들의 이야기에 겹쳐진다. 재훈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 차연서가 붙인 ‘Daddy’의 이름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재훈과 차연서가 서로에게 주어진 곤란함, 즉 아버지의 이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공통 지점이 이 영상에서 더욱이 드러난다.

대상이 마냥 기쁜 경험만을 주지 않았을 때, 혹은 곤혹스러운 딜레마의 형태로 나타날 때, 어떤 방식의 애도가 가능할까? 아마 갈팡질팡하며 다가가는 방식의 애도일 것이다. 이곳에는 차연서와 재훈 각자의 헤어짐의 방식이 있다. 하나, 차연서가 전통적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던 차동하에게 느끼는 ‘낯섦’, ‘황당함’ 혹은 ‘매혹’이 있다. 둘, 재훈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적으로 주어진 남성 젠더에 느끼는, 성별에 대한 불쾌함으로 인한 분열이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각각의 아버지를 병치해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정원에는 두 사람의 공통된, 무엇으로부터의 탈주와 포섭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단단해서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무엇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름으로 실감한다. 그것으로부터 이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별이란 계속해서 대상을 떠올리고 그에 대한 감정을 이해해 보며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그래서 어쩌면 비가역적인 시간 안에서 스스로 정리하는 일이다. 이러한 애도는 기억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 찾아올 수 있기에, 자신에게 다시금 다가올 무언가를 채비할 기술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짚어보고 싶은 것은 차연서가 차동하에게 느끼는 애도의 여러 갈림길이다. 그가 행하고 있는 이 애도의 투쟁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떤 것인지 더 파악하고 모으고 말하기 위해선 많은 언어들과 여백들이 필요할 테다. 이러한 양가감정을 미끄러운 땅에 비유해본다. 착지하고 선택하려고 하면 흔들리는 땅을. 재훈과 이 전시에서 나타나는 양가성에 관해 이야기 하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재훈은 반대로 동시에 그것이 이것도 저것도 맞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 흘러넘치는 양가감정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떠올려본다.

재훈이 ‘거상거상 거상거 居喪居喪居喪居’라는 제목은 ‘차연서가 무언가를 죽이고 살리고, 다시 죽이고 또 살리는’ 것이기도 하다고, - 그 미움이 차연서의 차동하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든, 모두를 지옥으로 만드는 구조에 대한 죽임이든 - 그 잔혹한 반복의 움직임을 나에게 전해주었을 때, 나는 입 모양으로 그 말을 흉내 내보며, 살고, 죽고, 사는 번뇌의 움직임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당연한 비정함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곳에는 산자의 날카로워진 혹은 쇠약해진 마음을 다루는 애도가 있다.


# 6 필요한 상상
이곳의 수수께끼에 얼마나 걸어 들어갔는지 질문해 보고 싶다. 나는 보고 듣고 온 유령들의 저항을 증언한다. 이곳에서 느꼈던 새로운 기관을 상상적 상처로서 확신해 본다.





편집 및 도움: 재훈



최시원
시각예술과 비평에 대해 공부하며 글을 쓴다. 조각을 마주할 때 생기는 경험과 이후 생겨나는 말들에 관심이 있다.